경국대전을 반포한, 성종 - 성군의 이면엔 주요순 야걸주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평산훈남 역사스토리 11번째 이야기는 세종대왕을 능가한다고도 평가받는 성군 성종이야기입니다. 어린나이에 보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고있던 원상들을 견제하고 권력의 균형을 맞춤과 동시에 활발한 편찬사업을 진행했던 조선의 왕에 대해 알아봅시다.
조선의 태평성대를 완성한 군주로 자극적인 내용들은 별로 없어서 좀 재미가 없을수도 있는 왕이지만 한번 알아보도록 할게요.
*성종 키워드
- # 수렵청정
- # 조선의 출판사
- #붕당의 불씨
- #주요순 야걸주
자 그럼 하나씩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수렴청정
성종은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어요. 이전왕인 예종이 갑자기 급사하였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원래 성종은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어요. 왜냐면 예종시절 왕위 계승서열이 3위였기 때문이죠.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그가 왕이 된 이유는 세조의 첫째아들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해 버려서 둘째아들인 예종이 왕이 된 것이었어요. 하지만 이 예종도 20세가 되는 해에 갑자기 죽어버리자 왕족의 최고어른인 세조의 부인이었던 정희 왕후와 당시 엄청간 권력을 가지고 있던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원상들이 다음 왕위를 의논하게 되었어요. 왕위계승서열 1순위였던 예종의 아들은 당시 4세로 너무 나이가 어려서 왕위를 이을수 없었고 그 다음 두번째 서열인 의경세자의 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월산대군을 건너뛰고 그의 동생인 성종이 왕이 되었어요. 정사에서는 정희왕후가 월산대군은 병약하여 왕위에 어울리지 않아 당시 자을산대군인 성종을 추대했다고 하는데 야사에서는 한명회가 그의 사위인 성종을 지원하여 왕이 되게 했다고도 알려져 있어요. 이 대목 때문에 한명회가 이전 왕인 예종을 독살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거에요. 이렇게 조선의 아홉번째 왕이 된 성종은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세자의 지위를 거치지 않고 왕이 된 특별한 케이스의 왕이 되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왕이 된 이후 신하들이 왕을 교육하는 경연제도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연에 참석하여 최다 경연 참석자라는 모범생 타이틀도 가지게 되었죠.
여튼 이렇게 어린나이에 갑자기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왕이 된 성종을 돕기위해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하게 되었어요. 수렴청정은 왕이 너무 어려서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왕실의 어른이 왕이 정사를 돌볼때 뒤에서 발을 치고 앉아 정사를 듣고 조언하여 어린 왕을 보좌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렴청정시에 실질적인 권한은 왕이 아니라 수렴청정을 실시하는 당사자에게 가게 되는것이므로 일반 대신들이 아니라 왕실의 사람으로 이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죠. 이 수렴청정은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처음으로 실시한 제도인데 참고로 측천무후는 수렴청정시에 획득한 권력의 힘에 취해서 결국은 황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버린 안좋은 역사가 있는 제도이기도 하죠. 하지만 정희왕후는 정말 현명하게 수렴청정을 실시 하였어요. 직접적으로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고 성종이 대전에서 신하들과 안건에 대한 의견을 나눈 후 정리하여 정희왕후에게 따로 보고를 하면 조언을 하는정도로만 수렴청정을 하였어요. 그마저도 결과가 좋은것들은 성종의 생각대로 해서 이렇게 결과가 좋았다고 하고 결과가 좋지 않을때는 자신이 고집을 부려 이렇게 되었다고 말을하니 훗날 성종이 친정을 실시할때 그 기반을 잘 다져주었죠. 그리고 성종이 20세가 되어 성인이 되었을때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그만두고 성종이 친정을 할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니 수렴청정의 모범 답안이라고 할수 있겠어요.
#조선의 출판사
성종은 노력형 천재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정치를 잘하면서도 조선 모든 왕들중에서 가장 많은 경연기록을 세울정도로 모범생이었어요. 이렇듯 많은 업적을 남긴 성군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나 많은 편찬사업을 진행하였어요.
첫번째로 성종 최대의 업적이라고 평가 받는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반포하였어요. 솔직히 경국대전은 세조가 편찬사업을 시작하고 많은 부분을 진행한 상태에서 예종이 거의 완성단계까지 만들었으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성종대로 넘어와 마지막 정리 작업을 마친후 반포한 것이라 성종의 업적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긴합니다만, 어쨌든 반포를 성종이 하였으므로 성종의 업적이라고 평가하고있어요. 이는 시험에도 아주 많이 나올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어요. 경국대전은 조선의 헌법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고 이런 법령을 문서화 하여 표준을 만들었으니 법을 집행함에 있어 일관되고 공평한 판결이 가능해 졌다는것에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어요. 경국대전 이외에도 삼국시대 부터 조선전기 까지의 시를 모아 만든 <동문선>, 고조선 부터 고려시대 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동국통감>, 조선의 예법과 절차를 정리한 <국조오례의>, 각 지역의 지리와 풍속등을 자세히 기술한 <동국여지승람>, 궁중음악의 악보와 악기에 대해 정리한 <악학궤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많은 편찬사업을 진행하였어요. 아쉬운 점은 이 많은 업적들이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고있다는 거에요. 성종은 세종대에 만들어졌다가 세조재위 기간에 사라진 집현전을 대신하여 홍문관의 기능을 개편하였고 이를 통해서 학문을 연구하고 많은 편찬사업을 진행하였어요. 이 홍문관의 기능은 먼 훗날 정조 시절의 규장각이 이어 받았다고 보시면 되요.
#붕당의 불씨
성종이 보위에 올랐을 당시 왕권에 가장 위협이 되는 세력은 세조가 키워놓은 원상들이었어요. 원상들은 세조의 왕위 찬탈과정에서 공을 세운 공신들인데요. 조선전기 엄청난 개혁을 성공한 훈구파의 계보를 이어가지만 이들은 점차 고려말 권문세족의 행태를 닮아갑니다. 인사권을 장악하여 조정의 주요 직책에 자신들의 사람을 심어놓고 대농장을 소유하여 재물을 탐하며 심지어 매관매직을 일삼았다고 하니 오죽하면 예종대에는 사람들이 사사로이 원상의 집에 방문하지 못하게 하는 법까지 만들었을 정도이니 원상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성종은 이 원상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훗날 조선의 역사를 장식하게 되는 사림이에요. 고려말 새롭게 떠오른 정치세력인 신진사대부는 두가지 당파로 나뉘게 됩니다. 고려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자는 온건파 사대부와 역성형명을 통한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는 급진파 사대부로, 급진파 사대부는 정도전이 온건파 사대부는 정몽주가 이끌었죠. 당시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면서 온건파 사대부들은 모두 중앙정권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내려가 학문을 닦고 후학양성에 힘을 쓰게 되었어요. 그중에서도 영남학파의 대두 김종직을 필두로한 사림들이 성종시절에 대거 등용이 되고 원상들을 견제하기 시작하게 되죠. 당시 성종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결과론적으로 이 사림들이 조선 말기까지도 정권을 잡게되고 이들이 서로 당을 나누어 싸우는 붕당정치를 이어가니 정말 조선이 망하게 되는 이유중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죠.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성종 옥의티라고 할수있는 점이 연산군의 엄마 폐비윤씨를 사사한점과 이 사림들을 등용하여 붕당을 불씨를 지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리학적 정치관념에 너무 사로 잡히고 태평성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국방의 힘에 너무 관심을 가지지 않아 조선의 강력했던 군사력이 성종대에서 약해졌다는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주요순 야걸주
성종의 별명이 바로 주요순 야걸주 입니다. 이게 무슨말이냐면 낮에는 요순임금처럴 성군이나 밤에는 걸주처럼 술과 여자를 엄청나게 밝혀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해요. 성종 본인이 엄청난 주당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성욕마저도 어마어마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왕 27명 중 후궁이 가장 많은 왕이 태종이고 그 다음이 바로 성종입니다. 참고로 세번째가 의외로 세종대왕이에요. 성종은 궁내의 여자들로 만족하지 못하고 밤에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일반 양반들이 가는 술집에 신분을 속이고 드나들었다고도 해요. 그리고 항상 독주를 즐겨 마셨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좀 안스러운 생각도 들어요. 왕권을 능가하는 원상들을 견제하며 정치를 해야하는데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을까 생각이 되고 이를 잊기위해서 밤마다 독주와 여인을 품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을 것 같긴해요. 그로인해 연산군의 엄마인 폐비윤씨가 엄청난 질투를 느꼈을 것이고 여러 악행들을 일삼자 폐서인되고 결국은 성종이 사사하게 되니 다음대 왕인 연산군이 조선 최악의 폭군이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것 같아요. 이런것 보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조선의 왕도 결국은 일반 백성들과 비슷한 한명의 인간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죠. 이런 성종의 모습은 드라마 왕과나 에서도 잘 묘사된것으로 알고있는데 참고로 드라마속의 어우동과 성종이 연류되었다는 것은 완벽한 허구이며 역사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어우동이 실질적으로 성종대에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킨 인물은 맞지만 국왕인 성종까지 연류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성종은 어우동의 스캔들을 알게되자 그녀를 극형으로 다스려 풍속을 바로잡으려고 하였어요. 그리고 성종은 또 다른 취미가 있었는데 바로 동물 수집이었어요. 성종이 수집하여 기른 동물중에는 개, 고양이, 말 등은 당연하고 매, 기러기 등과 같은 조류도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성종은 특히나 매를 아꼈고 매를 이용한 사냥을 즐겼다고 해요. 이 취미를 가지고도 대신들과 많이 싸웠다고 해요. 몇년째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게 부족한 현실인데 왕은 매를 키우면서 사치를 한다고 대신들이 성종에게 매를 전부 풀어주라고 강요하게되고 결국 성종은 아끼던 매를 모두 풀어줬어요. 또 명나라에 낙타라는 동물이있다는 것을 안 성종은 그 낙타를 사오라고 명령하기도 하였으나 그마저도 대신들의 반대에 실행되지 못했다고 해요. 이렇게 사사건건 성종이 하는 일에 대해서 대신들이 간섭하니 많이 답답했을것 같죠?
이렇게 조선 최고의 왕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 성종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술과,여인, 나름의 사치도 즐기는 그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성종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오늘도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하고 다음에 연산군의 포스팅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위 내용들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자녀분들이나 어떻게 역사 공부를 해야할지 그 방법을 모르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녀의 역사 교육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