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역사교육 참고 자료/조선왕조이야기

조선의 건국자, 태조 이성계 - 위화도 회군으로 건국의 기틀을 잡다.

평산훈남 2023. 8. 21.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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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본업이 너무 바빠서 요즘 업뎃을 너무 못했네요..

평산훈남 역사 스토리 다섯번째 편은 태조입니다.

국운이 다한 고려를 살리기보다 새로운 왕조를 새우기로 결심한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드라마 < 육룡이나르샤 >

태조는 아무래도 조선의 건국자이기 때문에 여러 매체에서 많이 다루어진 왕이에요. 대표적으로 육룡이 나르샤, 나의나라 와 같은 드라마가 있어요. 여러 매체에서 다루어진 왕이기에 많은 분들이 자세히 알고 계셔서 포스팅 할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조선 역사를 다루면서 태조이야기를 하지 않을수는 없었기에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럼 이성계의 키워드를 알아볼까요?

* 태조 키워드

  • #육룡이나르샤
  • #가별초
  • #위화도회군

태조 이성계는 아무래도 조선의 창업군주이기 때문에 왕이 된 이후의 이야기 보다는 왕이되기 까지의 과정이 많이 알려져 있어요. 사실 왕이 된 이후에는 아들인 태종 이방원에게 밀려서 딱히 큰 업적이 있는것도 아닌지라 저도 왕이 되기 전의 이야기를 주로 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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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나르샤

육룡이나르샤 라는 말은 세종 대에 편찬된 용비어천가에서 세종의 6대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그위로 거슬러 올라가 환조,도조,익조,목조 로 이어지는  6대조까지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놓은게 용비어천가에요. 즉 육룡이나르샤 라는 말은 세종의 6명의 조상을 여섯 용으로 비유하여 여섯용이 날아올라 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궁금한점이 있어요. 조선의 임금은 모두 전주 이씨 입니다. 그런데 이방원의 고향은 고려의 동북면 끝자락에 있는 함경도에요. 현재 전라북도에 있는 전주에 본을 둔 전주이씨가 왜 고향이 함경도일까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육룡중 첫번째 용인 목조 이안사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이안사는 고려시대에 전주의 지방관리였어요. 그때 전주의 관기와 사랑에 빠져 있었는데 전주의 방호별감이라는 관직에 부임해온 관리가 그 관기를 취하려 하자 이안사가 그 방호별감이랑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방호별감이 고을 현감과 가까운 사이라 그 현감이 현재 도지사급인 안렴사에게 이 문제를 알리는 바람에 감옥에 투옥 될 위기에 처해졌어요. 그래서 이안사는 집안의 가병과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이끌고 현재 강원도 삼척으로 이사를 가버렸어요. 요즘이야 고향떠나 이사하는게 이상할게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자신의 고향을 뒤로하고 이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흔하지 않는 경우이고 심지어 따르는 백성들까지 단체로 이사를 하는일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을거에요. 이때 이안사를 따라 삼척으로 이주한 백성이 170호라고 하니 170가족인거죠. 이때 당시에 한가족에 최소 4명이라고만 쳐도 700명 이상의 인원에 부양인구까지 합치면 수천명이 단체로 이사를 한거에요. 그래서 삼척에서 자리잡고 살고있는데 전주에서 싸움이 있었던 그 방호별감이 삼척의 안렴사로 부임해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이에 이안사는 다시 짐을 싸서 현재의 함경도 원산으로 이주하게 되었어요. 이때 역시 170호가 따라 이주했다고 하니 이안사가 리더십이 보통이 아니었던것 같아요. 이때부터 이안사의 가문은 대대로 함경도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이성계의 고향도 함경도가 된 것이에요.  여튼 함경도 원산에 자리잡고 있으니 고려 조정에서 상당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안사에게 의주 병마사라는 직책을 내리면서 원나라의 군대와 맞서 싸우라고 하였어요. 하지만 이안사는 원나라의 군대와 싸우기는 커녕 원나라에게 투항하여 고려를 배신해 버렸어요. 나라를 지키라고 벼슬까지 주었으나 이를 배신하고 오히려 적국에게 투항하여 다루가치라는 직책을 받아 고려를 감시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이안사는 이후 고려를 배신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이성계와 묘하게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어요. 이안사 이후로 대대로 쌍성총관부 소속 다루가치 직책을 수행하던 전주이씨 가문은 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의 대에서 다시한번 고려왕실과 손을 잡게 됩니다. 이자춘이 고려의 공민왕과 공모하여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면 내부에서 호응하기로 하여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몰아내고 철령이북지역을 수복하게 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때부터 전주이씨 가문은 다시 고려로 귀하하여 고려의 벼슬을 받아 생활하게 되었어요. 어쨌든 나라를 배신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 저만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걸까요? 조선을 건국하여 역상의 승자가 되었기에 이런 집안 출신이라는게 큰 문제가 안될수 있지만 만약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실패했다면 아마도 그의 조상들까지 싸잡아서 대역죄인 가문으로 낙인찍혔을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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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별초

고려 후기의 시대에는 지방의 호족이 자신들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사병을 보유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어요. 이 들을 가별초라고 부르는데 흔히 이성계의 사병이 워낙 규모도 크고 용맹하기도 하여 흔히 가별초라 하면 이성계의 호위 사병집단을 가리키게 되었어요. 이성계는 약 2천여명의 가별초를 정예화 하여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가별초의 전투력이 고려의 정규군보다도 훨씬 뛰어났다고 하니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고 해요. 특히나 이성계는 자신의 무력도 끝판왕 급으로 높은 편이지만 군대의 통솔력까지도 만렙수준이고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는 심리전에도 매우 능숙했다고 해요. 단적인 예로 가별초가  전장에 도착하면 항상 큰 소라로 만든 나팔인 대라를 한번 불고 전투를 시작했다고 해요. 전장에서 "뿌우~~" 하고 대라소리가 울려퍼지기만 해도 용맹하기로 소문난 가별초가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적군의 사기가 꺽였다고  하니 정말 요즘으로 치면 북한이 미사일 쏘고 뭐하고 하다가도 미국 핵항모 한대가 부산항에 입항 하면 조용해 지는 효과와 비슷한것 같아요. 여튼 이성계는 이 가별초를 기반으로 고려에서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되요. 원나라의 정규군에 폐해서 고려로 몰려오는 수만의 홍건적을 무찌르고 계속해서 고려의 영토를 수탈하는 왜구를 토벌하는 등 고려말의 신흥무인세력의 중심이 되어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됩니다. 고려말에 문벌귀족최영장군과 비견될 만큼 성장한 이성계는 또다른 신흥세력인 신진사대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고려의 재상의 지위에 까지 오르게 되요. 이성계에게 잘 훈련된 가별초가 없었다면 약해질대로 약해진 고려의 정규군으로 이런 공훈을 세울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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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

쌍성총관부를 몰아내고 철령이북지역을 수복한 고려왕실은 원나라가 무너지고 명나라가 중국을 차지한 틈을 노려 요동정벌을 계획하게 됩니다. 공민왕 시해 후 고려 32대왕이 된 우왕이 최영장군의 적극적인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계획하게 됩니다. 이에 이성계는 4대불가론을 제시하며 요동정벌을 반대하죠. 4대불가론의 내용을 보면 첫째,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치는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둘째, 지금은 농번기라 농사를 지어야할 장정들을 이끌고 전쟁을 치르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 셋째, 장마기간에 출병을 하게 되면 병장기가 녹슬고 활의 아교가 늘어나 전쟁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넷째, 고려의 군대를 모두 모아 요동으로 가면 남부에 득세하고 있는 왜구를 막을 수 없다. 이렇게 네가지의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을 극구 반대한 이성계의 주장은 우왕과 최영장군에 의해 묵살되고 그대로 북벌을 단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하게도 요동정벌을 끝까지 반대한 이성계에게 고려의 전 군대를 몰빵해주면서 요동으로 출병시켰다고 하니,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그동안 이성계가 고려에 세운 공이 그만큼 믿음을 줄만큼 엄청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끝까지 출병을 반대한 사람에게 나라의 전 군권을 쥐어주며 전쟁을 시켰다니, 너무나도 무모했던것 같아요. 최영장군의 이 처음이자 마지막 저지른 실수가 고려의 역사를 바꾸어버리게 되죠. 어쨌든 출진 명령을 받았으므로 요동으로 진격을 시작한 5만명의 정예군사가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인 위화도에 도착하자 비가 엄청나게 와서 발이 묵이게 됩니다. 이때 이성계는 다시한번 조정에 상소를 올려 도저히 전쟁을 할 상황이 안되니 철군을 하게 해달라고 하지만 묵살당합니다.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를 칠것이냐, 항명하여 고려로 돌아갈것이냐를 두고 엄청난 고민을 했을것 같은데, 결국 이성계는 항명을 선택합니다. 도저히 명나라를 이길 자신이 없었던것 같아요. 현실적으로 불가능이라고 판단하고 5만의 고려 정예군을 이끌고 개경으로 회군합니다. 이게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지요. 당시 고려는 국가의 모든 병력을 몰빵하여 이성계에게 쥐어줬기 때문에 개경을 수비하고있는 병사는 5천명 정도밖에 안되었다고 해요. 심지어 이성계가 회군하니 도착하는 성들마다 성문을 스스로 열고 이성계를 받아들였다고 해요. 이렇게 이성계는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하였으며 최영을 죽임으로서 고려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어요. 이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으로 왕을 다시 갈아치웠다가 역성형명 동지였던 조민수의 도전을 이겨내고 온건파 신진사대부였던 정몽주를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름으로서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의 시대가 열리게 된 거에요. 변방인 함경도 출신으로 시작하여 고려최고의 권력자가 된 이성계는 본인의 무력과 통솔력에 더하여 신진사대부들의 지지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모두 아우르는 유일무이한 존재였어요.

 

이렇게 태조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어떻게 보면 반란을 일이킨 역적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그 시도가 성공함으로서 반란이 아닌 역성 혁명이 된 위화도 회군. 반란의 수괴가 아닌 조선의 건국자가 된 이성계. 역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것 같아요.

 

그럼 다음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글을 쓰면서 나무위키의 내용을 참고하였을 알려드립니다.

 

위 내용들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자녀분들이나 어떻게 역사 공부를 해야할지 그 방법을 모르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녀의 역사 교육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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