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평산훈남 열번째 역사스토리는 조선왕조 두번째로 재위기간이 짧은 예종입니다. 1년 2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도 그렇지만 선대인 세조와 후대인 성종사이에 끼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왕이기도 합니다. 예종이 그냥 이대로 잊혀져도 무관한 왕인지 한번 살펴볼까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예종은 세조와 성종이라는 굵직한 왕들 사이에 끼여있는 왕이라 좀 인기가 없어요. 그래서 그를 다룬 매체도 별로 없는데요. 자료를 찾아보니 영화 <임금님표 사건수첩> 이 예종의 이야기라고 하더라구요. 솔직히 저도 이 영화를 보지 못해서 뭐라 할말은 없긴합니다. 하지만 이선균 배우님이 연기를 하신것 같은데 캐스팅에 대한 고증의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종은 19세의 어린나이에 사망하였는데 이선균 배우님이 19세로 보이진 않네요..^^;;
* 예종 키워드
- #구공신과 신공신
- #뭐든 빠름
- #깨알같은 업적
- #독살설
솔직히 많은 내용을 다루기에는 이야기 거리가 많지 않기 때문에 간단간단하게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공신과 신공신
예종의 아버지인 세조는 공신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본인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을 도운 공신들에게 많은 포상도 주고 그들의 권력을 견제하기도 하였어요.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운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등은 그 위세가 점점 커져서 대농장을 소유하고 매점매석을 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어요. 그러자 이시애의 난 평정에 큰 공을 세운 남이, 이준을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며 새로운 공신으로 대우했어요. 그래서 기존의 훈구대신이라고 불리던 공신을 구공신, 새롭게 공신반열에 오른 이들을 신공신으로 분리하여 관리했죠. 남이와 이준이 모두 당시 20대인데 병조판서와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고 하니 세조가 얼마나 이들을 아끼고 전략적으로 성장시켰는지에 짐작할 수 있을것 같아요. 세조는 말년에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자 자신의 둘째 아들 예종에게 선위하기 직전에 두 공신집단 중 구공신들에게 원상제라고 하는 호칭을 부여하며 이들을 재상의 반열로 올려놓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아들이 나이가 어린데 젋은세대의 신공신보다는 나이가 많은 구공신들이 예종의 치세에 걸림돌이 되지 않고 적당히 대우만 해준다면 자신의 아들을 지켜줄것 같다고 생각했을 거라는 분석이 있어요. 하지만 예종은 결코 이 공신들과 친하지 않았던것 같아요. 예종은 세조의 선위를 받아 왕이 되었지만 선위받은 바로 다음날 세조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예종의 공식적인 치세의 첫번째 안건은 사망한 세조의 묘호를 정하는 것이었어요. 이에 공신들은 신종이라는 묘호를 올렸으나 에종은 우리아버지는 위대하신 분이므로 "종"이 아니라 "조"로 끝나는 묘호를 드려야 한다고 고집부려서 세조로 바꾸었다고 해요. 묘호에 조로 끝나는 것은 보통 나라를 창건하거나 큰 공이 있거나 국난을 이겨낸 왕에게 붙이고 종으로 끝나는 묘호는 보통 덕이 있는 왕에게 부여되는 묘호라고 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세조는 왕위를 빼앗다시피 하여 왕이되었으므로 국가 창건과 별반 다르지 않은것 같기도 해요. 참고로 고려시대는 조로 끝나는 묘호를 받은사람은 태조 왕건 밖에 없고 조선은 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정조,순조 등 많은 왕들이 있어요. 여튼 이뿐만이 아니라 1년 2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남이의 옥사 사건또한 벌여졌으니 당시 공신과 예종의 대립이 매우 심각했었던것 같아요. 조선 제일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보위에 오른지 4년 후에야 무오사화를 일으키며 사림들을 죽이기 시작하는데 예종은 즉위한 원년에 공신들을 죽여버렸으니 예종의 재위기간이 길었으면 조선의 역사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뭐든 빠름
예종은 정말 뭐든 빠릅니다. 첫번째로 본인이 12살에 자식을 가지게 되요. 현재 초등학생 5학년이 아빠가 된거죠. 이 때문에 예종이 성 조숙증이 있었다는 견해가 아주 많습니다. 이때 예종의 왕비가 한명회의 딸이었는데 아이를 나으면서 사망했다고 해요. 두번째로 19세라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어요. 이 때문에 어머니인 정희왕후가 조선왕조 최초의 수렴청정을 실시 했었죠. 정희왕후는 나름 수렴청정을 잘 한것으로 평가받는다고 해요. 공신들의 권력이 왕권을 넘어서는 시절에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왕위를 지킨다는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것 같아요. 세번째로 어린나이에 사망했어요. 예종은 앞서 말한대로 1년 2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가졌고 심지어 그 기간마저도 수렴청정과 원상제도로 인해 본인 뜻대로 국정을 펼친게 몇건 되지 않아요. 19세의 나이에 즉위하고 1년 2개월의 재위기간 이었으니 20세에 사망한 것이죠. 예종의 사망을 두고 원래 앓고 있었던 폐혈증이 사인이다라는 병사론과 독살됬다는 음모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요. 이 내용은 마지막 키워드에서 다시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깨알같은 업적
예종은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나름 열심히 일하였는지 몇가지 업적이 있어요. 이 업적들을 보면 대부분 공신들의 권력을 견제하고 부정부패 척결과 관련 된 내용들이었어요. 옛날 정치인들의 잘못을 정리한 역대세 라는 책을 편찬하였구요. 아버지 세조가 편찬을 시작한 경국대전을 거의 완성단계에 까지 완성시켰습니다. 정말 성종은 마지막에 반포만 한것 같은데 성종 최대 업적중 하나가 경국대전 반포라고 평가받고 있으니 세조와, 예종의 입장에서는 조금 섭섭할것 같아요. 각 도 관찰사들에게 명하여 능력있는 인재들을 찾기도 하였고 효자나 열녀를 찾아내어 기리게 하였다고 해요. 그리고 사람들이 공신들의 집에 찾아가서 뇌물을 받치고 관직을 사고파는 일들이 비일비제하게 일어나자 공신들의 집에 사사로이 출입하는것 자체를 금지시켜 버립니다. 이렇듯 예종은 선대의 공신이자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 한명회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요.
#독살설
드디어 제가 예종에 대한 포스팅을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나왔어요. 예종의 사망원인에는 첨예한 의견대립이 있어요. 정사에는 어릴때부터 앓고 있었던 족질이라는 병이 원인이다라고 되어있지만 한명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견해도 매우 많은것이 사실이에요. 족질이라고 하는 피부병으로 인하여 상처에 세균이 감염되고 그로인해 폐혈증으로 사망하였다고 분석되는 의견과 사사건건 자신과 의견대립을 하면서 부딛히는 예종을 한명회가 독살해버렸다는 주장이 둘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참고로 조선의 역대 왕들은 유전병인지는 모르지만 피부병이 정말 많았어요. 예종의 아버지인 세조만 하더라도 종기가 나서 사망하였고 역대 왕들이 피부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엄청 많아요. 어쨌든 독살설이 생기게된 원인은 예종이 죽기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병이 많이좋아졌다고 하며 건재한 모습을 보였는데 하루아침에 사망해버린것에 근거를 두고 있어요. 그리고 예종의 시체가 새까맣게 변해있었다는 기록도있고 예종 사망 후 불과 반나절만에 후계서열 3위였던 성종이 다음 왕으로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는것도 한명회에 의한 독살설의 근거로 내세워 져요. 성종도 한명회의 딸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한명회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위해 예종을 독살하고 성종을 왕위에 올렸다는거죠. 당시의 한명회는 그만한 힘이 있는 엄청난 권력을가진 신하였기때문에 이런 음모론이 붉어지는 거에요. 여러분은 예종의 죽음이 단순 병사라고 생각하시나요 독살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오늘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내용들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자녀분들이나 어떻게 역사 공부를 해야할지 그 방법을 모르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녀의 역사 교육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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