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평산훈남 여덟번째 역사스토리는 조선왕조 최초의 적장자 출신의 왕인 문종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문종을 그저 세종과 세조 사이에 잠깐 스쳐 지나간 문종과 단종 부자로만 생각하시고 각종 매체에서는 주로 세종이나 수양대군이 주인공으로 나와 그 주변인물로 병약한 문종의 모습만 보이니 나약한 왕으로만 생각하시 더라구요. 과연 문종이라는 조선의 다섯번째 왕이 그렇게 나약하기만 했을까요?
문종이 병이 나서 몸이 약하고 재위기간이 매우 짧은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문종은 조선왕조 처음으로 정식 군주교육을 받은 왕으로 상당한 능력을 보유하고 정치경력 또한 결코 짧지 않은데요.
문종에 대한 오해와 진실. 오늘한번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종 키워드
- #왕비없는 왕
- #숨은 발명가
- #베테랑 정치인
솔직히 문종의 재위기간이 짧은건 사실이기 때문에 많은 업적을 남기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거리가 많지는 않은 왕입니다. 그래서 문종의 업적 보다는 문종이 처했던 상황과 그의 숨은 능력, 문종에 대해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바로 잡는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 왕비없는 왕
왕의 책임 중 둘째가라면 서러워할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후사를 잇는 것입니다. 왕의 아들은 왕 개인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보통의 조선 왕들은 적게는 수명, 많게는 십수명의 후궁들을 들이면서 까지 많은 자식들을 낳아 길렀습니다. 그런데 문종은 중전이 없었어요. 물론 결혼을 하지 않은 완전 노총각은 아닙니다. 한나라의 세자와 왕을 지낸 인물이 결혼을 안했을 리는 없죠. 결혼을 했으나 사별도 아니고 무려 이혼을 두번이나 합니다. 이게 문종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직접 간택한 며느리를 쫒아내 버리죠. 그것도 두번이나..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부터 알아 보도록 할게요.
문종은 조선왕조가 세워진 이후 처음으로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왕입니다. 그야말로 정통성의 정점에 계신 분이었죠. 그래서 문종은 7세라는 어린나이에 세자가 되었고 세자가 어느정도 나이가 차자 아버지인 세종대왕은 직접 자신의 며느리가 될 여인을 고릅니다.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내노라하는 집안의 여식들을 살펴서 한 사람을 골라 문종과 결혼시키죠. 그 여인이 바로 휘빈 김씨 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려진바 없지만 문종은 휘빈 김씨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요. 일설에는 휘빈 김씨가 박색이었다는 말도 있는데 문종은 명나라 사신이 그 용모를 칭찬한 기록이 있을만큼 잘생겼었다고 하니 외모가 마음에 안들었을것 같기도 해요. 여튼 문종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자 휘빈 김씨는 세자빈이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는 영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압승술이라고 하는 건데요. 이게 뭐냐면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 위한 주술 같은거에요. 휘빈 김씨가 실행한 압승술은 두가지가 알려져 있는데 그 첫번째는 세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발을 태워서 그 재를 술에 타서 먹이면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온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고 해요. 하지만 그 방법이 잘 통하지 않자 두번째는 교접하는 뱀의 분비물을 모아서 가지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을 가질수 있다고 하여 그렇게 실행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런일들을 궁중에서 벌이고 다니니 그 이야기가 시아버지인 세종대왕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의 세종대왕은 조선초기 유교적 도덕성을 온나라에 확립시키기 위헤 노력중이었는데 자신의 며느리가 이런 말도 안되는 행위를 했다고 하니 참을수가 없어서 바로 휘빈김시를 폐서인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두번째 세자빈을 들이기 위해 다시한번 삼간택을 시행하죠. 두번째로 세자빈이 된 사람은 순빈 봉씨입니다. 이 순빈 봉씨는 간택 당시에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그 용모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조건으로 뽑인 세자빈이었어요. 이 대목에서 이전 세자빈인 휘빈 김씨가 용모가 아름답지 못하여 문종의 관심을 사지 못했다는 추측을 하는것 같아요. 어쨋든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며 세자빈이 된 순빈 봉씨에게 세종대왕은 열녀문이라는 책을 하사합니다. 하지만 순빈 봉씨는 시아버지가 내려주신 책을 읽기는 커녕 바닥에 던져버렸다고 하죠. 그리고 술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대낮에도 술을 마시고 술이 모자르니 사가에서 가져와서 마실정도로 술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세종은 두번이나 며느리를 내칠수 없으니 참았다고 해요. 두번째 며느리도 문종의 마음에들지 못하여 후사를 잇지 못하고 있으니 명문가의 여식들 중 몇 명을 골라서 문종의 후궁으로 들입니다. 이때 훗날 현덕왕후로 추존 되는 양원 권씨라는 여인이 임신을 하게 되죠. 이에 불안함을 느낀 순빈 봉씨는 가짜 임신스캔들을 벌이게 됩니다. 당연히 세종대왕은 후궁의 임신소식 보다야 세자빈의 임신소식에 너무나도 기뻐하였으나 이게 다 거짓말이었던걸 알게되죠. 그래도 세종은 참습니다. 그런데 순빈 봉씨는 하지말아야 할 일을 기어이 저질러 버렸어요. 바로 궁녀와의 동성애 행각을 벌여 버린 것이죠. 참고 참은 세종대왕이지만 동성애 까지는 참을수 없으니 순빈 봉씨를 폐서인 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더이상 세자빈을 다시 간택하느니 문종의 아이를 임신한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았어요. 이 권씨는 문종과도 사이가 좋아 나름 밝은 미래가 점쳐졌으나 아이를 출산한 이후 죽어버립니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단종입니다. 이 이후부터 문종은 더이상 결혼하지 않았고 즉위식에도 중전이 없이 거행하였습니다. 중전을 역할을 대행한 것은 수석 후궁인 숙빈 홍씨가 대행했다고 해요. 한나라의 지존인 왕이 왕비가 없었다니 여러분은 놀랍지 않나요?
# 숨은 발명가
세종대왕은 본인이 뛰어난 것도 대단하지만 정말이지 자식교육을 참 잘시키신것 같아요. 그의 아들들이 하나같이 능력이 출중하니 왕족은 정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뛰어난 자신의 아들들에게 관직을 내릴정도였다고 해요. 장남인 문종은 유학 기본이고 서예와 과학에 매우 높은 경지에 올랐고 둘째인 수양대군은 불교,정치,군사, 서예 등에 두루 뛰어난 모습을 보였으며 셋째인 안평대군은 당대의 명필로 소문이 자자하고 예술에 대한 그 식견이 매우 높은 경지였다고 평가받고 있어요.
보통은 장영실이 측우기를 만들었다고 알고있죠. 하지만 장영실은 측우기를 제작만 했어요. 이 측우기의 아이디어는 바로 문종이 낸 것이죠. 문종이 비가내리는 양을 측정하기 위하여 통일된 표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측우기의 아이디어를 내었고 그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장영실이 구리로 만든 측우기를 제작하였어요. 문종은 군사무기 분야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세종때 만들어진 신기전을 바탕으로 화거라는 신개념 무기를 만들었어요. 당시 신기전은 화약을 이용하여 화살을 쏘아올리는 일종의 미사일이라고 이해하시면 되는데 이때의 신기전은 그 정확도와 위력이 그리 세지 않아서 살상무기보다는 신호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문종은 조금더 연구를 하여 화거라고 하는 무기를 만들었어요. 신기전이 단발의 미사일 시스템이라면 화거는 다련장 로켓포였어요. 바퀴가 달린 수레위에 화약이 달린 화살을 50여개 꽂을수 있는 발사대를 연결시켜서 한번에 수십발의 로켓포를 적진에 쏘아버리는 당시로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든이가 문종이에요.
#베테랑 정치인
일반적으로 문족하면 떠오르는 수식어는 보통 나약한 왕, 빨리죽은 왕, 재위기간이 짧은 왕 등 부정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문종은 나약하고, 일찍 죽었고, 재위기간이 짧았을까요? 지금부터 문종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로 문종은 나약했을까요? 문종은 병이 있어 자주 아프고 결국 병사하긴 했지만 결코 나약한 왕이 아니었어요. 할아버지인 태종이 왕권을 강화시켜 놓았고 아버지인 세종이 태평성대를 이룩해 놓은 와중에 적장자로 태어나 무려 28년동안 왕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문종은 그 정치적 기반이 매우 단단하였기 때문에 나약하진 않았을 거에요. 오히려 훗날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도 문종 생전에는 쿠테타를 꿈도꾸지 못할만큼 명분,능력,성품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왕이었죠. 정치 뿐 아니라 형재들과의 우애도 매우 좋아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이 그들의 형인 문종을 매우 잘 따랐다고 해요.
두번째로 문종은 젊은나이에 죽었다고 생각해요. 문종은 37세라는 비교적 젊은나이에 사망합니다. 하지만 이는 현대의 기준으로 젋은나이에 사망한 것이고 조선왕조 왕들의 평균 수명이 44세로 훗날 세종의 성군계보를 잇는다는 성종도 37세에 사망했으나 단명했다는 수식어는 잘 붙지 않아요. 단지 2년 2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 때문에 빨리 죽었다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은 왕이죠.
세번째로는 재위기간이 짧은 왕이라는 건데,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분명 문종의 재위기간은 2년2개월로 상당히 짧은편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문종은 28년의 왕세자 시절을 보냈어요 그 중 7년8개월은 아버지 세종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했어요. 실질적으로 왕의 직무를 수행한 것이죠. 이 7년 8개월은 아버지 세종의 재위기간 32의 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긴 기간이에요. 대리청정한 기간과 실제 재위기간을 합하면 거의 10년에 걸친 통치기간이 되어 버립니다. 이는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며 문종이 이렇게 대리청정으로 왕의 직무를 잘 맡아주었기 때문에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가하시나요?
이렇게 문종에 대하여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여러 매체에서 문종에 대하여 너무 약하게만 묘사하여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들어요.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역사공부를 많이 하여 이런 훌륭한 왕이 평가절하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것 같아요.
그럼 오늘도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내용들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자녀분들이나 어떻게 역사 공부를 해야할지 그 방법을 모르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녀의 역사 교육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녀 역사교육 참고 자료 > 조선왕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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