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평산훈남 역사스토리 첫번째 주제 광해군 편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광해, 왕이된 남자" 라는
영화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죠. 이병헌 님이 아주 연기를 잘 해주셔서 재미있게 본 영화입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어떤 주제로 가장 먼저 스토리를 꾸밀까 고민한 결과
역사에 너무나도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연산군과 함께 항상 조선 폭군 순위에 상위랭크 되는
광해군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저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님을 먼저 밝히며
그저 역사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취미생활로 스토리를 작성하고 있으니
혹여라도 주관적인 견해 및 역사적 사실과 다른점이 있을수도 있는점 미리 양해부탁드립니다.

먼저 광해군이라는 한 사람을 잘 표현하는 키워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봤습니다.
* 광해군 키워드
- #조선최초 서자출신 왕세자
- #실리외교
- #대동법
- #인조반정
그럼 키워드를 하나씩 짚어가며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 조선최초 서자출신 왕세자
광해군의 이름은 "이혼" 입니다. 아버지인 선조와 후궁 공빈김씨 사이의 둘째로 태어났어요.
첫째인 형님은 임해군 "이진" 입니다.
선조가 정비인 의인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엊지 못하여 대군이 없는바 후궁과의
사이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임해군이 세자책봉 서열 1순위였으나 임해군은 왕자시절부터
아주 개막장 인생을 살아온터라 형과는 정 반대로 능력자였던 광해군이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세자가 됩니다.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래 14명의 왕을 거쳐오면서 한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서자의 세자 책봉 사례였습니다.
그럼 선조가 오랜기간동안 세자책봉을 하지 않다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갑자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선조는 광해를 세자로 책봉하기 싫어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선조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공빈김씨가 광해군을 출산한 이후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선조는 광해군을 어미의 배를 찢고 나온 아들이라며 매우 싫어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해요. 광해군은 엄마인
공빈김씨의 얼굴도 알지못한 채 중전인 의인왕후에 의해 키워졌어요. 다행히 의인왕후의 성품이 매우 인자하여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키웠고 이에 광해군도 의인왕후를 친모대하듯 매우 공경하며 자라났다고 합니다.
두번째 이유는 본인이 선왕인 명종의 적통 왕자가 아니었어요.
명종의 이복동생인 덕흥대원군의 아들인 선조는 항상 방계출신 군주라는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자신을 이을 세자는 적통 대군중에 책봉하고 싶어했지요. 그런데 정비인 의인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으니 세자책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거에요.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의 군대는 왜군이 속수무책으로 패하고 수도 한양까지 위험에 처하자
선조는 제대로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이때 최종 목적지는 명나라와의 국경지대인
의주였으며 이렇게 국왕이 도망가는게 쪽팔렸는지 갑자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자신은 여차하면 명나라로 망명할테니 세자인 광해는 조선에 남아서 왜군에 맞서 싸우라는 것이었죠.
정말 어처구니 없는 처사였지만 광해는 조선에 남아 의병을 모아서 왜군과 맞서싸워 많은 공을 세웠고
이로서 조정 대신들 및 백성들에게 인정받는 세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이 끝난 후 선조는 광해보다도 더 어린 인목왕후를 새로운 중전으로 삼으며
새장가를 갔고 그 사이에서 그 유명한 영창대군을 얻게 됩니다. 드디어 그토록 바랬던
적통 왕자를 얻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끔찍히도 아끼고 사랑하여 광해군을 폐세자 시키고
영창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고 싶어했는데요.. 하지만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광해가 받친 찹쌀밥을 먹고 선조가 갑자기 죽어버린거죠.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겨우 세살
이었다고 합니다. 선조가 급사를 하였기 때문에 중전인 인목왕후가 차기 왕권을 지목해야 하는데
인목왕후도 눈치가 빨랐던 지라 지금 자기아들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면 조정대신들의
지지를 받고있는 광해군에 의해 목숨이 위험해 질것을 알았던 그녀는 깔끔히 포기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한 바
광해군은 16년의 세자생활을 끝으로 조선 15대 왕이 되었답니다.
참고로 영창대군에 대해서 모르시는분들을 위해서 간단히 소개하자면 왕자를 귀향보내서 초가집에 가둬놓고
아궁이에 불을 계속 지펴서 쪄죽였다는 그 이야기 들어보셨죠? 그때 죽은 그 왕자가 바로 영창대군입니다.
광해가 서자출신 왕인데 선왕의 적통 대군이 떡하니 살아있으니 대신들이 입을모아 영창대군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니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계속 보호하다가 마지못해 귀향을 보냈는데 광해군의 명인지 신하들의 과잉충성인지는
알수 없으나 현 왕의 이복동생이자 선왕의 적통 대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립니다.
이 사건은 훗날 광해군이 실권하게 되는 인조반정의 명분인 "폐모살제"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 실리외교
광해군의 두번째 키워드는 "실리외교" 입니다. 다른말로는 "중립외교" 라고도 하는데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광해군이 즉위했을 당시 조선을 가운데 두고 중국 본토에는 조선이
사대하는 명나라가 있었고 만주 지역은 그 이름도 유명한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 하고 급속도로 세를 불려서 건국한
후금(이후 청나라로 국호 변경함) 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 왜(일본) 는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구요. 이때 후금이 명나라와 맞장 뜨기위해서 전쟁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조선에게 구원병을 요청합니다.
임진왜란때 명나라가 군대를 파병하여 일본을 물리쳐 줬으니 이번에는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서 후금을 물리치자는
명분이었죠. 어떻게 보면 당연한 요구였고 그시대 성리학에 목숨걸고 있었던 사대부들도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를
구해야 한다며 즉시 파병할 것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런데! 광해군이 정세 흘러가는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니, 명은 지는 해요 후금은 떠오르는 태양이니 딱봐도
후금이 대세였던 것이었죠. 지금 명을 도와서 후금과 전쟁을 해서 이기면 다행이지만 만약 진다면?
후금의 창끝은 명을 도왔던 조선으로 향할게 뻔히 보였던 거에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도와줬던
명나라를 나몰라라 하는것도 좀 아닌것 같고..이때 광해군은 엄청난 묘수를 떠올립니다.
명을 구원하기 위해 파병은 합니다. 강홍립 이라는 장군에게 1만 3천의 군사를 딸려 명을 도우라고
파견 시키죠. 하지만 광해는 강홍립 장군에게 밀명을 내려 명과 함께 전쟁은 하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된다면
후금에 투항하라고 합니다. 또한 후금 황제 누르하치에게는 편지를 보내서 조선이 어쩔수 없이 명과의 관계때문에
파병은 하지만 이는 옛 은혜를 갚는 것일뿐 후금과 척을 질 생각이 없으며 상황에 따라 조선군은 투항할 것이라고
미리 알렸다고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어요.
말그대로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대의 명분 보다는 지금당장 조선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실리를 선택한 외교.
이것이 바로 광해군의 실리외교. 다른말로는 중립외교 라고 회자되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실리외교가
이후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 명을 버리고 오랑케의 나라 후금을 도왔다는 것이지요.
#대동법
광해군은 왕위에 즉위하고 나서 참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임진왜란때 소실된 궁궐을 보수하고, 역사서를 보관하는
사고를 정비했으며, 국고를 채우기 위해 양전사업을 하는 등 그야 말로 많은 업적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업적 중에서 광해군의 최대 업적은 누가뭐라해도 대동법 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모읍니다.
대동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조세 제도를 알아야 합니다.
조선의 세금은 크게 세가지였습니다. 소유한 토지에 부과되는 전세(현재의 토지세), 국방의 의무 또는 나라의 공사에 동원되는 역, 마지막으로 각 지방의 특산품을 바치는 공납, 이렇게 세가지 세금제도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세번째인 공납인데, 이 공납은 엄청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인하여 백성들을 너무나도
힘들게 하는 세금제도였습니다. 국가에서 각 지방(마을) 마다 특산품목과 양을 정해주고 그걸 마을 백성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나라에 진상하는 제도가 공납입니다. 이 내용만 보면 공납이 뭐가 문제인지 이해가 안되시죠?
뭐 그동네 많이 생산되는 특산품중 일부를 바치는게 뭐가 힘드나 할수도 있는데.. 한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A라는 마을에는 딸기가 유명합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너희는 딸기가 특산품이니 매년 딸기 100바구니 내라고 정해줍니다.
그럼 A마을에 100가구가 있다고 하면 각자 딸기 한바구니씩 내서 100바구니를 조정에 바칩니다. 100가구 중에
어떤사람은 딸기밭 만평을 농사 짖고 어떤사람은 밭이 없어서 농사를 못짖는데도 똑같이 한바구니씩 내어야 하는거죠.
근데 이게 다가 아니에요.. 내년이 되어서 나라에서 다시 너네 딸기 특산품이니 또 딸기 100배구니를 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해에는 딸기농사가 흉년이에요.. 그래서 딸기가 없어요.. 그런데도 딸기를 내야해요..이때 마을 사또가 나섭니다.
너네들은 그냥 농사짖고 나한테 돈을주면 내가 옆동네가서 사다가 세금낼게.. 이러는 거죠. 그때 사또랑 짝짜꿍해서 옆동네 가서 대신 물건을 사다가 나라에 납품하는 상인을 대납업자 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대납업자가 수수료를 너무나도
심하게 챙기는거죠. 딸기 한바구니 천원이라고 하면 대납업자에게 3천원을 줘야지 한바구니를 살수 있는거에요. 거기다
흉년이 들었지만 그래도 딸기를 조금이라도 수확한 집은 대납업자에게 부탁하지 않고 자신이 수확한 딸기로 겨우
한바구니를 만들어 사또에게 세금이라고 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른 문제가 있으니.. 사또가 딱 보니 딸기 품질이 안좋은거죠(좋아도 안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이 떨어지는 딸기를 주상전하에게 바칠수 없다 라고 하며 납부를 방어합니다. 이게 바로 방납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딸기를 가져온 백성이 그런 전 세금을 어떻게 내요 라고 물어보면
사또가 알려줍니다. 김아무개라고 하는 대납업자가 있는데 거기 딸기가 참 질이 좋다. 그러니 김아무개 한테 사서
납부를 하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백성은 김아무개한테 가서 딸기 한바구니 얼마에요? 라고 물어보니
세상에나..1000원짜리 딸기 한바구니가 10만원 이라는 거죠....무려 100배... 역사서에 보면 적게는 수십배에서 많게는
수백배였다고 합니다. 그 엄청난 차익을 대납업자와 사또가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벌어들이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또
이게 끝이 아니에요...이런 엄청난 횡포속에서 도저히못살겠다 해서 백성이 그 마을을 떠나서 도망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옆집사람이 먼저 튀었어요.. 그러면 옆집사람것 까지 자기가 내야 된데요.. 거기다 좀 떨어져 살고있는 사촌형이 또
도망 갔어요.. 친인척이 대신 내야된데요..이렇게 순식간에 세배의 (사실은 3백배) 세금을 부담하게된 백성은
마지막 선택으로 자살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거에요..
이 말도 안되는 공납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중종시절 조광조를 비롯하여 선조시절 유성룡과 이이가 특산품으로 세금을 받는 공납대신 쌀로 세금을 받는 수미법을 주장하였습니다. 쌀로 세금을 받았다가 조정에서 필요한게 있으면 그 쌀로 특산품을 사면 되는 아주 획기적인 방법이었어요. 그당시에는 쌀이 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수미법의 기본 개념은 모두 똑같이 세금을 내는게 아니라 토지결수에 따라 세금을 차등 분배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땅이 많은 사대부들 및 대납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었던 대납업자들이 목숨걸고 반대했었다고 해요. 이 수미법을 광해군 즉위 원년에 대동법 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 한하여 시행해 버린거죠. 비록 전국대상이 아니라 경기도에 국한하여 시행한 법이었지만 조선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대동법이 시행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업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대동법이 전국에 시행되기까지 무려 10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 시작을 한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업적인지 가늠할수 있을거에요. 역사가들은 이 대동법 시행이 조선의 민주 자본주의 사회의 첫 시발점으로 해석한다고 해요. 쌀로 세금을 거두어 들인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서는 시장이 조성되어야 하고 그 시장이 활성화 되니 지역 경제가 발전하면서 돈이나 마찬가지인 쌀이 유통되니 바로
자본주의 사회가 이루어졌다는 논리이죠. 일본 식민시대에 조선은 미개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구시대의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니 일본이 조선을 도와 경제를 부흥시켰다는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라고 해요.
#인조반정
광해군은 앞서 말했듯 즉위한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성리학과는 생각의 차이가 크고 너무나도 개혁적인 군주였어요.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을 제외한 서인과 남인은 하루가 멀다하고 상소를 올리며 명나라를 사대하고 오랑케인 후금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죠. 거기다 봉산옥사, 계축옥사 같은 대형 옥사가 일어나서 지지 반대세력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해 버렸죠. 결국은 서인 주축 인사들이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을 옹립하여 인조로 세우면서 광해군은 왕위를 찬탈당하고 제주도록 귀향가게 됩니다.
그럼 인조반정의 명분이 무엇이길래 광해군의 왕권을 찬탈하는 쿠테타를 일으켰냐. 여러 명분이 있었지만 크게 세가지 정도로 정리가 됩니다.
첫번째로 대국 명을 배척하고 오랑케의 나라 후금을 가까이한점, 둘째로 폐모살제의 폐륜을 저지른점, 셋째로 광해군의 폭정(과도한 옥사 및 궁궐축조) 이 그 명분이었어요.
명을 배척하고 오랑케의 나라 후금을 가까이한건 사실입니다. 앞서 실리외교의 내용에서도 나온 이야기인데요. 광해는 분명이 명을 싫어했을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광해군이 세자로 지명되어 명의 조정에 이를 알리고 책봉을 받으려고 하니 명에서는 그간의 관례를 깨고 5번이나 세자책봉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해요. 이는 명나라의 당시 황제가 자기가 사랑하는 서자 황자에게 세자 책봉을 하려고 하니 명 대신들이 서자에게 세자책봉은 안된다고 극구 말리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에서 서자에게 세자를 주겠다고 하니 명나라 대신들이 허락을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이것 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때 광해군은 조선에 남아 의병을 모으고 국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전국의 전장을 오가며 많은 공을 세웠는데요 이때 명나라에서 지원온 명군이 조선의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모습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봤던지라 명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을것 같아요.
그런 와중에 후금은 조선의 중립외교를 반기며 광해군과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광해군이 집권한 시대에 대의명분을 목숨과 같이 생각하는 성리학의 사상에 사로잡혀있는 사대부의 세상이 아니었다면 광해군은 오히려 후금의 침략위협으로 부터 나라를 지켜낸 성군으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을것 같아요.
두번째 명분인 폐모살제에 대한 내용은 어머니를 폐하고(가두고) 형제를 죽였다 라는 내용인데요. 즉 광해군이 폐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명분이었어요. 이때 폐모는 선조의 두번째 중전 인목대비였고 살제는 선조의 유일한 적통대군인 영창대군 이에요. 경상도에서 발생한 강도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은 강도가 탈취한 돈을 광해군을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자금으로 쓰일 계획이었다고 당시 집권여당인 북인들이 몰아갑니다. 그 결과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향가서 골방에 불을 떼서 사람을 말려죽이는 증살로 목숨을 잃게 되고 인목대비는 창경궁에 유폐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이게 앞서 언급되었던 계축옥사 사건입니다. 이때 영창대군을 유배보낸건 광해군이 맞지만 증살에 대해서는 광해군의 지시인지 신하들의 과잉 충성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이 나뉘고 있는것 같아요. 역사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기 마련이니까요. 심지어 인목대비의 유폐에 대해서도 창경궁에 가뒀다는 사람도 있고 창경궁이 얼마나 넓은데 그게 가둔거냐면서 원래 창경궁은 대비들이 지내는 용도의 궁궐이므로 가둔게 아니다라는 사람도 있어요. 이것 역시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는 부분인거 같아요. 어쨋든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의해 아들 영창대군이 죽고 아버지 김제남도 죽고 자신은 유폐되었으니 광해군을 엄청나게 증오하며 살았던것 같아요. 인조반정이 성공으로 마무리되고 광해군이 인목대비앞에 끌려갔을때 인목대비가 자신이 직접 죽인다고 칼을달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고 해요. 하지만 왕을 죽일수는 없으니 제주도로 귀향을 보내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은 제주도로 귀향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해요.
세번째 명분은 광해군의 폭정인데요. 폭정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과도한 궁궐축조로 국가재정을 파탄으로 내몰았고 잦은 옥사로 나라의 인재를 죽이고 공포로 정치를 했다는 거죠. 그런데 말입니다. 옥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궁궐축조는 좀 아닌거 같아요. 임진왜란이 발생해서 조선의 3대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립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양으로 선조가 돌아왔을때 궁궐이 없어서 덕종(의경세자)의 아들이자 성종의 형님이 되는 월산대군의 집을 궁궐삼아 지냈다고 해요. 일국의 왕이 일개 대군의 집을 궁궐삼아 있었다는게 너무나도 비참한 현실인거죠. 국가의 체면과 국왕의 권위가 말이 아니었던 거죠. 물론 이 월산대군의 집은 훗날 증축되어 지금의 덕수궁이 되었으니 규모가 작진 않았을 것 같지만 그래도 왕이 왕족의 개인 집에서 지냈다는게 비참한 현실인건 확실한것 같아요. 광해군이 비록 무리하게 궁궐을 재보수 한 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 필요한 내용이 아니었나 합니다. 현재 서울에있는 5대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중 경복궁을 제외한 4개의 궁궐이 광해군 치하에 축조된 궁궐입니다. 경복궁은 그 규모가 너무커서 재건축하지 못했는데 현재의 경복궁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건설하였습니다.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인조반정이라는 단어가 올바른가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 "반정" 이라는 단어는 돌이켜 바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 및 남인들의 주장으로는 광해군이 잘못했으니 인조를 주축으로 하는 반정을 하여 나라를 바로잡았다고 하지만, 과연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후에 조선의 처지가 좋아졌냐는 겁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격이 높아지고 왕권이 강화되고 백성들의 삶이 좋아져야지 비로소 반정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조반정으로 인해서 조선 건국이래 가장 강력한 위기가 찾아오고 실제로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앞서 광해군이 후금과 매우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고 설명드렸잖아요? 그런데 조선에서 반정이 일어나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자 후금의 2대황제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략합니다. 바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한건데요. 특히 이 병자호란때는 영화 남한산성에서 묘사된대로 조선의 국왕이 그들이 오랑케라고 무시하던 후금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세번 무릎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다) 라는 엄청난 치욕을 받게 됩니다. 이때 바닥에 떨어진 조선의 국격과 인조의 왕권과 백성들의 고통은 글로 표현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단적인 예로 이때 조선인들이 사냥당하다시피 잡혀서 노예로 끌려간 수만 최대 50만명이라고 합니다.
두차례의 호란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인조 즉위 2년만에 이괄의 난이라고 하는 내부 반란이 일어났어요. 반정 공신인 이괄이 자신이 2등공신에 책봉되었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요. 나라를 바로잡기위해 반정을 했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로 내부반란까지 일으켰다고 하니 참담한 역사인것 같아요. 심지어 이 반란으로 인조는 수도 한양을 반란군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저는 인조반정은 "반정" 이라는 단어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건 그냥 당파싸움에서 밀려난 서인과 남인이 주도하고 인조가 개인의 원한을 갚기위해 일으킨 쿠테타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결론
광해군은 결국 인조에 의해 폐위되었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를 폭군으로 기록했습니다. 인조 이후의 조선 왕들이 모두 인조의 핏줄이기 때문에 역사가 바로잡히지 않은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왕이 죽으면 선대왕에게 주어지는 묘호도 받지 못한 조선 전체에 4명밖에 없는 왕이 되어버린거죠. 심지어 훗날 숙종시대에 4명중 2명 (공정왕 -> 정종, 노산군 -> 단종) 은 복권되어 묘호를 받게 되었지만 시대의 변명거리가 없는 연산군과 더불어 광해군은 끝내 묘호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록"이라교 표현하지 않고 광해군일기 라고 표현하여 그 역사가 기록되어 있죠. 임진왜란으로 부터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서고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중립외교로 국가의 위기를 잘 피해갔던 광해군이 여러분은 아직까지 폭군으로 보이시나요?
이상 평산훈남의 역사스토리 1편 광해군편을 마무리 합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위키백과, 황현필 한국사 유튜브채널, 설샘TV 유튜브채널의 내용을 참고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감사합니다.
위 내용들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자녀분들이나 어떻게 역사 공부를 해야할지 그 방법을 모르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녀의 역사 교육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녀 역사교육 참고 자료 > 조선왕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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