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왜 거란이 고려를 침입했을까? (침입의 배경)
때는 고려 성종 12년, 서기 993년.
북방의 신흥 강국, 거란(요나라)은 점점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어요. 당나라가 망한 이후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노리던 거란은, 고려가 송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송나라와 손잡으면, 우리 거란의 남쪽이 불안해지잖아?”
그뿐만 아니라 압록강 동쪽 여진족도 신경 쓰였고, 결정적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국력이 쑥쑥 자라고 있었거든요. 거란은 견제할 필요를 느꼈고, 결국 군사를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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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의 침공과 고려의 위기 (전개 과정)
993년, 거란군 80만 명(기록상, 실제로는 10만 내외가 통설)이라는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합니다.
사실 고려의 1차침입이 있기 전 여진에서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려 한다는 정보를 주었으나 고려조정은 여진의 이간계라 판단하고 이 정보를 무시해 버렸어요. 몇 달 뒤 다시 한번 여진이 동일한 정보를 주자 고려는 그제서야 준비를 했지만 거란의 1차 침입이 바로 발생해 버린 거죠.
거란 장수 소손녕이 이끄는 군대는 파죽지세로 안주(평안북도 지역)까지 진격했어요. 고려는 당황했죠. 군사력 차이도 있었고, 당시 외교적 해법이 시급했어요.
소손녕의 속전속결에 당황한 고려 조정은 항복론과 이에 더하여 할지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이때 나타난 고려의 영웅 대도수 장군이 안융진에서 거란군에게 승리를 거두자 고려조정은 강화론으로 돌아섰어요. 고려조정은 거란의 강한 공격을 막기 위해 청야전술을 펼치려 했어요. 이때 서희만 서경에 있는 막대한 곡식으로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데 불태워 버리면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청야전술을 반대한 서희에게 직접 거란과의 협상을 명령했어요.
사실 거란도 1차 침입 때는 고려를 정벌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는게 정설이고 이는 안융진 전투에서 패하고 난 이후부터는 진격을 멈추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고려에게 회담을 요구한 점으로 미루어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서희도 단신으로 거란진영으로 들어가서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을 하게 되었지요.
📌 외교로 막은 전쟁, 서희의 ‘담판’
고려 조정에서는 전쟁보단 외교로 해결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문신 서희가 협상 대표로 나섭니다.
소손녕은 "고려가 송과 친하고, 우리 거란과 여진을 방해하니 침입한 것이다"라고 따지며 송과의 국교를 끊고 거란과 국교를 맺자고 요구합니다.
이에 서희는 이렇게 응수합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입니다. 압록강 동쪽은 본래 우리 땅인데 여진이 잠시 차지한 것뿐입니다.
우리가 송과 손잡은 건 거란이 먼저 위협을 줬기 때문이고, 앞으로는 거란과도 우호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진이 강동 6주를 차지하고 고려와 거란의 길목을 막고 있으니 그들을 몰아내 준다면
거란과 당장이라도 국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설득에 소손녕은 군대를 돌리며 강동 6주를 차지하고 있는 여진을 몰아내줬고,
고려는 오히려 압록강 동쪽 6주(귀주, 통주, 곽주, 철주, 융주, 흥화진)를 되찾게 됩니다.
저 강동 6주는 이후에 있을 고려 2차, 3차 침입 때 고려를 방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적인 지역이 됩니다.
적의 침입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말로 막아낸 서희의 위대한 담판.
이게 바로 '서희 외교 담판', 고려 외교사의 전설입니다.
📌 숨은 영웅들, 그리고 강감찬 이전의 이야기
이 시기 강감찬은 아직 역사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 1차 침입에서 빛을 본 영웅은 바로 서희였어요.
하지만 군사적 대응도 일부 이뤄졌고, 당시 국경 지역 장수들은 곳곳에서 유격전으로 거란군을 견제했답니다.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한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이 안융진에서 거란군을 격퇴하면서 고려 조정의 대세가 바뀌게 되었지요.
비록 격전보다는 협상이 중심이 되었지만, 고려는 이 전쟁을 통해 북방 국경을 확장했고, 자주적 외교를 증명했어요.
📌 1차 침입의 의의와 교훈
- 전쟁을 막은 외교의 힘, 서희의 담판은 고려가 자주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는 나라였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 압록강까지 국경 확대, 군사력 없이도 실리를 얻은 대표적 사례입니다.
- 거란과의 갈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후 2차, 3차 침입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기도 했습니다.
💡 마무리하며
우리가 흔히 아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3차 침입의 이야기예요.
그렇지만 그 시작에는 ‘서희’라는 외교 영웅이 있었죠. 칼 한 자루 들지 않고 적군을 돌려보내고, 국토까지 확장한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강한 군대도 중요하지만, 강한 말 한마디가 전쟁을 이긴다.”
이 말, 그냥 생긴 말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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